4/20/2013

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


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
- 이성복


16
그 순간은 참 길었다

그 후 나는 우리가 만나기 전에 당신이 지나온 길을 지나갔고
당신은 내가 지나온 길을 지나갔습니다.
-로버트 프로스트, [만남과 지나감]

 바람 쐬고 오는 길에 저쪽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오고 있었다. 엉겁결에 길 옆 상가건물의 교회로 들어갔다.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나왔지만, 다니지도 않는 교회 입구에서 그 순간은 참 길었다. 또 언젠가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오는 걸 보고, 돌아서 다른 길로 들어가려다 정면으로 마주쳤다. 앞만 보고 걸었지만 그 순간도 참 길었다. 그리고 또 언젠가 내가 오는 걸 본 그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. 내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치면서, 그 순간은 한참 더 길었다.




18
그렇게 소중했던가

세계 위에, 지붕과 풍경들 위에,
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,
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
불타는 욕망과 함께.
-파블로 네루다, [고양이의 꿈]

 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,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,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.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,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.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,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.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을 쓸며,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.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,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.



25
이럴 땐 마냥 속아주기보다

아, 사랑
가고 돌아오지 않는!
-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, [세 강의 발라드]

 한 달 전 감기가 낫지를 않는다. 아스피린을 통째로 먹고 쌍화탕 물 마시듯이 마셔도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. 이만 하면 얼추 떨어질 만도 한데, 자고 나면 또 머리가 자근거리는 걸 보면, 하다 못해 좀 덜 구차한 퇴로를 찾는 것이다. 한번 내지른 울음 마냥 그칠 수만 없어, 울다 말다 곁눈질하는 코찔찔이 아이처럼. 이럴 땐 마냥 속아주기보다 더 나은 할 일이 있으리라, 오래전 떠난 사랑에게도 떠날 이유를 챙겨주는 속 깊은 사람처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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